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1 카빈 (문단 편집) == 대한민국과 M1 카빈 == 해방 직후 [[미군정]]이 폭동진압 및 치안유지 목적으로 [[경찰]]에 M1 카빈을 지급한 것이 한국군 및 한국 경찰의 M1 카빈 보유 시초다. 그런데 정작 [[국방경비대]] 및 그 후신인 [[대한민국 국군]]은 카빈보다는 [[M1 개런드]]의 지급이 더 순조로웠는데, 단적으로 [[대한민국 육군]] [[보병]] [[연대(군대)|연대]]의 총기 인가량은 M1 개런드 약 1,300정에 M1 카빈이 1,200정으로 거의 대등했으나 실제 보유량은 대부분의 연대에서 M1 개런드가 그나마 더 많고 카빈은 인가량보다 600정 이상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일정치는 않아서 어떤 연대는 M1 카빈이 더 많고 어떤 연대는 M1 개런드가 더 많은 등 들쭉날쭉이었지만, 전반적으로는 M1 카빈이 더 부족했다. 이는 특히 한국 육군의 연대 및 [[사단(군사)|사단]]이 미군의 동급 부대에 비해 지원부대가 1/3 이하인 등 빈약한 부대였던 탓이 컸다. [[6.25 전쟁|한국 전쟁]] 발발 이후 이 부족분들을 미군의 군사원조로 벌충하면서 이 갭이 점자 메꿔지기 시작했다. 일선 장병들은 단순히 '''M1 개런드보다 짧고 가볍다'''는 이유로 선호했다. 심지어 장탄수도 2배 이상 많고 반동도 적어서 보병간 전투에서 화력을 투사하기도 쉬웠다.[* 당시 한국군에게는 자동화기가 많이 보급되지 못했고, 그나마 보급되던 [[M3 기관단총]]의 경우 연사력이 느리고 무게도 많이 나가서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반면 북한군과 중공군은 71발 드럼탄창의 [[PPSh-41]]를 난사하며 돌격해왔기 때문에 한국군은 단거리 접전에서 불리한 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군 지휘부는 이 대신 잇몸이라는 생각으로 M1 카빈을 최대한 많이 보급하여 분대화력을 늘리는 선으로 해결했다.] 반면 관통력이 약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산악이 많은 한국지형 특성상 엄폐물 뒤에 숨은 적을 쏘아야 할 일이 많았는데, 권총탄과 다를 바 없는 카빈은 나뭇가지 몇개만 스쳐도 살상력이 대폭 떨어졌기 때문에 훨씬 화력이 강한 M1 개런드를 선호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들조차 M1 카빈의 화력이 약하다고 여겨서 주력 전투병들에겐 개런드를, 여성 같은 후방 인원에게 카빈을 지급했다.[* 이는 전투력 측면도 있겠지만 신체적 조건을 고려한 면도 있다. 당시 한국 여성 평균 신장으로는 개런드를 메고 숲속을 다니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조정래(소설가)|조정래]]의 [[태백산맥(조정래)|태백산맥]]에서는 체구가 작은 여성대원에게는 일부러 작고 가벼운 카빈을 구해다 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백골 할머니'로 유명한 간호장교 오금손은 전방 군 병원에 인민군 11명이 쳐들어오자 혼자 M1 카빈을 들고 6명 가량을 사살하는 활약으로 2계급 특진하기도 했다.] 반면 백골 유격대의 지휘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은 교전거리가 짧은 산악전 특성상 신속하게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카빈을 개런드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비슷한 환경에서 치뤄진 월남전에서는 초기 M1, M2 카빈으로 무장한 한국군이 베트콩을 상대로 괜찮은 전과를 올린 걸 보면 틀리지 않은 평가다.[* 사실 .30카빈탄은 권총탄 중에서 손꼽게 강력한 탄인 [[.357 매그넘]]보다 1.5배 이상의 운동에너지를 가진 탄이므로 무시하는 것도 곤란하다. 5.45mm와 운동에너지가 동급이라, 유효 사거리 내에서는 대인용으로는 충분하다. 사실 관통력문제는 탄투형상에서 비롯된 일인데, .30 카빈탄은 권총탄과 같은 라운드 팁(Round Tip) 형상이라서 소총탄에 비해 관통력과 저지력이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이래저래 말이 많긴 했지만, M1 카빈은 한국군 하사관 및 장교용 개인화기, 그리고 각종 지원화기 운용병력의 개인화기로 여기저기 뿌려지면서 최종적으로는 M1 개런드의 수량보다 더 많은 50만 정에 가까운 물량이 공급되었다. 이 덕분에 실질적으로 한국군 및 [[민간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소총]]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M16 소총]]이 대량 도입되면서 M1 개런드와 [[M1918 브라우닝]]은 단시간에 한국군의 일선에서 퇴출되었으나, M1 카빈과 M2 카빈은 가벼운 무게와 높은 휴대성으로 말미암아 좀 더 오랫동안 현역으로 남았다. 보병전투보다는 물류작업이 주인 후방 지원부대나 향토사단에서도 꽤 오래 사용됐고, 무거운 군장으로 적지에 침투해야 하는 [[특전사]]나 [[공작원#s-7|북파공작원]]들도 신뢰성과 휴대성이 좋다는 이유로 M1 카빈을 애용했다.[* 특히 북파공작원들은 무게와 길이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개머리판과 총열을 잘라서 개조하는 일도 빈번했다.] M16과 [[K2 소총]]의 보급이 완편되면서 M1 카빈은 점차적으로 치장장비로 전환, 후방 지역방위사단 (구 향토)및 [[예비군/대한민국|지역예비군]]의 주력 소총으로서 '''2014년까지''' 지속적으로 운용이 되었다. 이 때문에 M1 카빈용 소모품과 탄약은 1990년대 후반까지도 지속적으로 생산이 유지되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주력 소총으로서 쓰이기도 했다. [[파일:external/file1.bobaedream.co.kr/DQJ523b01ea1cb26.jpg]] 대한민국에서도 1972년부터 2년간 강도살인 행각을 벌인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의 두 범인이 훔친 M1 카빈을 이렇게 잘라서 사용했다. 위쪽 덮개까지 떼어 버리고 점퍼 속에 감추고 다녔다고 한다.[[https://m.youtube.com/watch?v=WXyXGpKZLh4|당시 사용된 총기를 에어소프트 건으로 재현한 영상.]] 한국 경찰은 1980년대까지 M1 카빈이 [[제식 소총|주력 소총]]이었다가 1990년대부터 K2 소총 및 M16 소총으로 카빈을 신속히 대체해서 이제는 M1 카빈을 운용하지 않는다. 특히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강원지방경찰청의 보유 소총은 대부분 카빈이었는데, 사태가 급박해 경찰청에서 강원청 산하 카빈들을 M16을 건너뛰고 한방에 K2들로 교체하며 카빈이 굉장히 빨리 사라졌다.[* 당시 뉴스 자료화면을 보면 자동화기의 부족으로 경찰관이 창고 구석에 쳐박혀 있던 [[M3 기관단총]]까지 꺼내와서 경계를 서는 모습이 방송을 타기도 했다.] 현재 경찰이 보유하고 있던 M1 카빈은 본래 육군의 M1 카빈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군사원조품목이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군의 재고와 통합해서 지역예비군 장비로 편입, 창고에서 --스프링과 나무가 다 썩고 삭아서 사실상 더 이상 총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상태로-- 조용히 잠들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